『살가죽들의 사랑』으로 진입하기
김승해의 『살가죽들의 사랑』은 정말 이상한 책이다. 좋은 의미에서 그렇다. 몇 편 읽고 나면 대체 이 사람은 왜 이런 데까지 가는지 궁금해지고, 조금 더 읽으면 아, 이 사람은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사람이구나 싶어진다. 섹스로봇의 사용자 매뉴얼을 792페이지라고 설정하고 그 성기 내부를 어떻게 세척해야 하는지 한참 떠드는가 하면, 채권추심업자를 전부 죽이면 사회 전체의 비용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테일러 급수로 계산한다. 사람이 개처럼 차에 치여 죽는 장면에서는 자율주행 모델의 판단 구조를 집요하게 설명하다가 결국 “그냥 차를 세우면 되었다”는 데 도착한다. 이런 식이다. 이 책은 자꾸 설명을 너무 많이 하고, 그래서 오히려 설명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지점까지 가버린다.
보통 이런 글은 피곤해지기 쉽다. 설명이 많고 기술적인 용어가 나오고 사회 시스템을 건드리기 시작하면 소설은 금방 주제의식에 짓눌린다. 그런데 『살가죽들의 사랑』은 이상하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설명이 길어질수록 사람의 몸이 더 선명해진다. 기술과 제도와 경제와 행정이 아무리 복잡해져도 결국 마지막에는 누군가 배가 고프고, 돈이 없고, 얻어맞고, 감옥에 가고, 피를 흘린다. 김승해는 복잡한 구조를 보여주기 위해 사람을 지워버리는 대신, 그 구조가 마지막에 사람 몸에 어떻게 도착하는지를 끝까지 본다.
표제작의 섹스로봇 이야기가 특히 그렇다. 사람들은 인간 여성을 감당하지 못하면서 섹스로봇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로봇은 관리해야 한다. 닦고, 말리고, 수리하고, 충전하고, 성기 내부의 주름까지 세척해야 한다. 귀찮고 비싸다. 그래서 결국 섹스로봇 산업은 망한다. 인간이 더 싸기 때문이다.
이 설정은 정말 지독하게 좋다. 기술이 인간을 대체하는 미래가 아니라, 인간이 기계보다 값싸기 때문에 살아남는 미래다.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로봇보다 더 경쟁력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인간의 몸은 스스로 상처를 수복하고, 흔적을 지우고, 더 적은 관리만으로 계속 사용할 수 있는 쪽으로 변해간다. 이쯤 되면 기술 발전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가격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무엇이 더 인간적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더 싸고 덜 귀찮은가의 문제다. 이 책은 이런 끔찍한 농담을 아주 태연하게 던진다.
그리고 김승해는 이런 농담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데 거리낌이 없다. 『내 몫을 찾아서』를 읽으면 거의 감탄하게 된다. 돈이 없는 사람에게 추심업자가 돈을 갚으라고 한다. 돈이 없다고 하자 투잡을 뛰라고 한다. 그러자 채무자는 당신이 투잡을 뛰어 대신 갚아주면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여기까지는 말장난처럼 보인다. 그런데 작품은 갑자기 세계의 추심업자를 죽였을 때 발생하는 비용 변화를 계산하기 시작한다. 수식이 나오고 급수가 나오고 싱귤래리티가 나온다. 너무 열심히 설명해서 웃긴데, 또 이상하게 설득력이 생긴다.
물론 추심업자를 죽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전제를 일단 받아들이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얼마든지 합리적으로 미쳐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현실의 많은 시스템이 그렇다. 첫 번째 문장은 아무도 다시 묻지 않는다. 그 뒤의 문장들만 정교하게 다듬는다. 그렇게 어느 순간 완벽하게 논리적인 괴물이 만들어진다. 김승해는 그 괴물을 비판하는 대신 직접 끝까지 조립해본다. 그래서 독자는 구조가 무너지는 지점을 설명으로 전달받는 것이 아니라, 그 구조 안에 한참 갇혀 있다가 이상함을 몸으로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시스템이나 기술의 소설이라고만 읽으면 가장 좋은 부분을 놓치게 된다. 아무리 봐도 이 책은 사랑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꽤 형편없고 지저분하고 편파적인 사랑에 관한 책이다.
여기 사람들은 사랑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이 되지 않는다. 욕하고, 때리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섹스하고, 울고, 사과하고, 또 망친다. 피와 오줌과 똥과 정액과 침이 계속 흐른다. 김승해의 사람들은 정말 무언가를 많이 흘린다. 마치 몸이라는 것이 애초에 제대로 밀봉되지 않은 물건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그런데 바로 그 상태에서 사랑한다고 말한다.
『붉은 말』은 특히 그렇다. 누군가 온갖 체액을 흘리고 있는데 다른 사람이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떠난다. 이게 너무 좋다. 사랑한다고 말했는데 떠났다. 사랑했는데 망했다. 사랑했는데 끝났다. 그렇다고 앞의 사랑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김승해는 이걸 정리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사실 사랑하지 않았던 것이라거나, 떠났으므로 사랑은 실패한 것이라거나, 결국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 그냥 둘 다 있었던 일로 놓아둔다. 사랑했고, 떠났다. 그 사이에 이상한 잔여물이 남는다.
『어쩌다보니』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밤새 싸우고, 키스하고, 섹스하고, 울고, 다시 싸우다가 마포대교까지 걸어간다. 한 사람은 더는 아무것도 망치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이제는 잘하고 싶다고 한다. 그리고 결국 둘은 헤어진다. 이상하게도 이 장면은 실패라기보다 어떤 결심처럼 읽힌다. 서로를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지만 그래도 상대가 있다면 자기 자신을 조금 더 잘 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기억 같은 것이 남는다. 이 책에서 사랑은 구원이 아니라 도움에 가깝고, 그것도 언제나 충분하지 않은 도움이다.
그래서 부제인 「조직원이 구타 당하면 반드시 복수한다」가 정말 좋다. 이 문장은 조금도 고상하지 않다. 정의에 관한 문장도 아니고, 보편적인 윤리를 선언하는 문장도 아니다. 우리 조직원이 맞았다. 그러니까 간다. 끝이다. 너무 좁고 편파적이고 위험한 규칙인데, 『살가죽들의 사랑』의 사랑이 대체로 이런 식이다.
사람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의 고통에 똑같이 반응하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이 맞으면 뉴스 한 줄로 지나가고, 어떤 사람이 맞으면 밤중에 신발부터 신는다. 사랑은 그런 차별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사랑은 윤리적으로 곤란하다. 그런데 동시에 사람이 실제로 움직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승해는 이 곤란함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인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미칠 수 있겠는가. 대체로 자기 사람 때문에 미치는 것이다.
표제작에서 JJ가 송영수를 패다가 그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프로틴바와 물을 건네는 장면은 그래서 정말 훌륭하다. 발포 비타민까지 넣어준다. 이건 웃기면서도 꽤 오래 남는다. 사람을 그렇게 패놓고 비타민이 웬 말인가 싶지만, 바로 그래서 이 장면이 좋다. 김승해는 JJ가 사실은 따뜻한 사람이라고 변명하지 않는다. 반대로 폭력적인 인간이니 그가 보이는 친절은 전부 위선이라고 정리하지도 않는다. 사람을 팬 것은 사실이고, 물을 준 것도 사실이다. 둘 다 지워지지 않는다.
이 책은 계속 이런 장면을 찾아낸다. 사람이 하나의 성격으로 설명되지 않는 순간, 윤리적 판단이 쉽게 끝나지 않는 순간, 앞의 행동과 뒤의 행동이 서로 정리되지 않는 순간을 좋아한다. 그래서 인물들이 살아 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정말 골치 아프게 살아 있다.
『피와 똥』에 이르면 이 책의 많은 것들이 한꺼번에 만난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사람을 개라고 판단해 죽인다. 센서도, 모델도, 데이터도 나름의 방식으로 제대로 작동했다. 사고가 나자 시스템은 책임자를 찾기 시작한다. 회사와 하청업체와 행정기관과 모델 설계와 검증 과정이 모두 얽혀 있지만 결국 감옥에 가는 것은 인간이다. 누군가는 책임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것은 시스템이 고장 났다는 사실이 아니다. 시스템이 꽤 멀쩡하게 작동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더 끔찍하다. 사람과 개를 구별하지 못했지만 내부 논리에는 문제가 없었다. 김승해는 이 설명을 정말 끈질기게 이어가다가 아주 간단한 문장에 도착한다. 그냥 차를 세우면 됐다. 이 순간 앞에서 읽은 모든 설명이 허공에 붕 뜬다. 설명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그럴듯했기 때문에 더 이상해진다.
그러고 나서 사람은 감옥에 간다. 남은 사람은 다음 날에도 출근해야 한다. 운동을 해야 하고 부모의 생일을 챙겨야 하고 청약통장의 자동이체를 확인한다. 누군가는 죽었고 동료는 감옥에 있는데 주식 차트를 들여다본다. 그러면서 작품은 반복한다. 하지만 살 것이다.
이 문장도 참 좋다. 희망의 문장처럼 보이지만 읽어보면 별로 그렇지 않다. 삶에 대한 위대한 긍정이라기보다 생물이 잘 안 죽는다는 쪽에 가깝다. 사람은 끔찍한 일을 겪고도 배가 고프고, 잠이 오고, 월급날을 기다린다. 부모 생일은 돌아오고 카드값은 빠져나간다. 사랑하는 사람이 감옥에 있으면 면회도 가야 한다. 인간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게 비겁하고 우습고 슬픈데, 바로 그 일상 때문에 다시 누군가를 돌볼 수도 있다.
아마 이 책이 정말 좋아하는 것은 이런 지속일 것이다. 세계가 엉망이라는 진단 자체는 새롭지 않다. 기술이 인간을 망친다는 이야기도, 자본주의가 사람을 착취한다는 이야기도, 사랑이 실패한다는 이야기도 이미 충분히 많다. 『살가죽들의 사랑』은 그다음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내일은 뭘 할 건데. 아침이 왔는데. 밥은 먹어야 하는데. 쟤는 감옥에 있는데. 걔가 맞았는데. 이제 어떻게 할 건데.
대답은 대체로 초라하다. 밥을 먹인다. 물을 준다. 면회를 간다. 영치금을 넣는다. 운동한다. 출근한다. 사과한다. 복수하러 간다. 물론 마지막 것은 문제가 있다. 이 책은 이런 행동들이 세계를 구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냥 사람이 결국 이런 것을 하면서 산다는 쪽에 가깝다.
책의 마지막에는 “모두 어쩔 수 없었다”라는 문장이 있고, 책의 앞에는 “어쨌거나 전 제가 할 일을 할 거예요”라는 문장이 있다. 이 두 문장을 같이 놓고 보면 『살가죽들의 사랑』이 갑자기 아주 선명해진다.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책임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세계 안에서 그래도 무언가를 한다. 잘하지도 못하고, 자주 망치고, 때로는 더 나쁘게 만들면서도 한다.
김승해는 이런 사람들을 꽤 좋아하는 것 같다. 나도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들이 좀 좋아진다. 좋은 사람들이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엉망이라서 그렇다. 이 사람들은 세계를 구하지 못하고 서로도 잘 구하지 못하지만, 누군가에게 물을 주고, 감옥에 찾아가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헤어지고, 또 살아간다. 그 형편없는 지속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는다.
『살가죽들의 사랑』은 아주 잘 만든 책이라기보다 아주 세게 살아 있는 책에 가깝다. 설명이 과하고, 농담은 위험하고, 인물들은 지저분하고, 사랑은 전혀 모범적이지 않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서로 잡아먹지 않고 이상한 균형을 이룬다. 기술적 명세와 욕설과 수식과 배설과 사랑이 한 책 안에서 이렇게 자연스럽게 엉겨 붙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읽다 보면 몇 번은 “아니 여기까지 한다고?” 싶고, 그다음에는 “그래, 여기까지 해야지” 싶어진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면 부제가 다시 보인다.
조직원이 구타 당하면 반드시 복수한다.
그래. 이 책은 결국 이런 식으로 사랑한다.